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 인민지원군 (문단 편집) ===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 (1951.4.22~6.10) === 한편 유엔군의 반격에 의해서 38도선 이북까지 물러섰던 중공군은 [[중공군 춘계공세|1951년 4월 말 다시 한번 서울을 점령하기 위한 대공세를 실시]]했다. 이것은 3개 야전군 약 7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유엔군을 포착 섬멸하고 서울을 다시 탈취한다는 야심만만한 작전이었다. 중공군은 1951년 4월, [[설마리 전투|설마리]]/[[파평산 전투]]와 [[사창리 전투]]에서 역시 한국군을 공세의 대상으로 삼아 전선을 돌파하려고 했고 4월 30일 서울 북쪽 8km 지점인 [[의정부]]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고질적인 약점이던 보급 문제와 미군과 영국군을 위시한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이 다시 발목을 잡았고 서울 코앞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끝내 서울 재점령에는 실패했다. 전선돌파가 지지부진하자 일단 정지하여 전열을 정비한 중공군은 5월 15일 공세로 나왔으나 5일 후 다시 정지했다. 중공군이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이 기회를 노려 유엔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명령했고 급기야는 [[용문산 전투|한 수 아래로 무시하던 한국군에게까지 대패를 당해]] 화천저수지의 이름을 [[파로호]]로 바꾸게 만드는 굴욕까지 당했다. 5월 1일 노동절에 서울에서 시가행진을 하겠다며 자신만만해 한 중공군 수뇌부의 예상과 다르게 춘계 대공세는 4월 말 공세를 시작할 당시의 전선 위치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10만이 넘는 사상자만 낸 채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